이정섭 목수

세상 이야기 2019. 7. 14. 08:31

조선시대 가구를 세계인의 가구로 만든 목수

단아한 아름다움이 마음을 끌어당긴다. 장식적인 요소라고는 거의 보이지 않는, 기능에 맞춰 자르고 짜 맞춘 나무 가구. 참나무ㆍ단풍나무ㆍ호두나무ㆍ벚나무ㆍ물푸레나무 본연의 색깔이, 나뭇결이, 군데군데 파인 옹이가 그대로 드러난다. 문화지킴이 재단법인 아름지기가 안국동 한옥에서 연 <생활 속의 아름다움-한옥 공간의 새로운 이야기>전에서 선보인 이정섭 씨의 가구다. 

한옥 생활에 어울리는 가구를 제시하는 이 전시를 위해 이정섭 씨는 3인용 소파와 낮은 테이블, 조명 콘솔, 식탁과 의자, 책장 혹은 장식장으로 쓸 수 있는 5단 장, 6단 장 등을 제작했다. 입식생활을 하는 현대인의 필요를 충족시키면서도 한옥이 갖고 있는 공간감, 정갈하고 단아한 맛과 잘 조화되는 가구다. 색을 입히거나 래커칠도 하지 않고 식물성 기름만 발라 마무리해 나무 그대로의 물성(物性)이 드러나도록 했다. 조각가 김창세 씨(목포대 교수)는 “미인의 화장하지 않은 생얼을 보는 것 같다”고 표현한다.

 

스스로를 ‘목수’라고 하는 이정섭 씨는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도관리 산골에 살면서 작업한다. 그렇다고 그를 은둔형의 폐쇄적인 인간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내촌을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찾아오는 문화마을로 만들겠다는 게 그의 포부다. 4960㎡(약 1500평) 땅에 살림집과 작업장, 전시장 등 건물 다섯 채를 지어 놓은 데 더해 1910년대 지어진 가게, 1955년에 시작한 이발소, 수십 년 된 창고 등 마을의 역사가 묻어나는 공간들까지 확보해 놓았다.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마을 전체를 문화공간으로 만들고 싶은 꿈 때문이다. 이미 4개 전시장 중 두 군데에서는 자신이 만든 가구를 전시하고, 두 군데는 독특한 기획의 전시를 열어 외지인의 발길이 잦다. 이번에도 마음 맞는 사람들과 일을 벌였다. 서울대 은사였던 화가 서용선 씨의 기획 아래 폐광지역인 태백과 홍천의 내촌 창고(전시 공간), 서울의 상명대학교에서 동시에 전시하는 ‘트라이앵글 프로젝트’를 벌인 것. 내촌 창고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작가들이 10월 31일까지 나무를 재료로 한 입체나 설치작품을 전시한다.

“전시 준비를 위해 일본에서 온 작가들을 먹이고 재우느라 그동안 정신이 없었다”는 이정섭 씨를 안국동 한옥에서 만났다. 그는 서울대 미대 서양화과 91학번이다. 그런데 화가가 아니라 왜 목수가 되었을까? 

“남이 쓴 책을 가지고 공부하는 게 아닌, 뭔가 창조적인 행위를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고민했습니다. 국문과나 미대, 음대를 가야 할 것 같았는데, 글 쓰는 재능은 없고 어렸을 때 반공 포스터를 잘 그려 칭찬받았던 게 생각나 미대에 지원했지요.”

그런데 ‘내가 하는 작업이 사회나 보통사람들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하는 의문이 맴돌았다. 동네 간판이나 광고 전단지 등 뭐든 만들어 준다는 의미로 ‘다해종합미술기획’도 시도하고, 서울시 공무원을 1년 동안 설득해 을지로 지하보도에서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기도 했다. 30m 길이의 통로 벽을 광고판만 한 캔버스에 아크릴로 그린 작품들로 채우느라 재료비 마련을 위해 어렵게 장만했던 카메라도 팔았다. 우리나라에 ‘공공미술’이란 개념이 제대로 자리 잡기도 전인 1999년의 일이다. 그러다 모든 것을 접고 시골로 가기로 결심했다. 

“서울생활을 이어 가려면 내가 누울 집 한 칸 마련하기 위해 아등바등해야 하는데, 그럴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이 들더군요.”

 

강원도 산골인 내촌을 세계인이 찾는 문화마을로 만들 것

무조건 농촌으로 내려간 그는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한옥 짓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곳이 있다는 것을 보고 태백으로 갔다. 기초적인 공부를 한 후 현장에 투입됐는데, 남들보다 쉽게 배워 재능 있다는 소리도 들었다. 대목이 되어 남의 집을 지어 주던 그는 3년 전부터 가구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현대인의 생활이 달라진 만큼 한옥도 시대에 맞춰 변화, 발전해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보통 ‘한옥’이라면 조선시대에 멈춰 있어서 정형화된 틀만을 요구하더라고요. 동어반복적인 일을 하는 데 회의가 일었죠. 그래서 가구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사방탁자 등 조선시대 가구를 보고 “흠 잡을 데가 없다”고 감탄했던 그는 그 정신을 오롯이 받아들이면서도 우리 시대 세계인이 함께 쓸 수 있는 가구를 만들겠다고 목표를 정했다. “저는 옛 형태를 재현한 한옥마을에서 한국성을 찾지 않아요. 산골마을의 야트막한 함석집이나 섬진강가에서, 박경리의 소설이나 김용택의 시에서 그걸 느끼지요. 그런 혼, 정신을 제 가구에 담아내려 했고요.” 

조선시대 가구를 바탕으로 했으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절제미가 서구의 모더니즘을 연상시키는 그의 가구는 얼마 안돼 눈부신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2005년 첫 개인전을 연 이래, 2006년 서울리빙디자인페어에서 ‘Editors awards’를 받았고, 2007년에는 세계도자비엔날레 초대작가로 선정된 데 이어 스위스에서 전시회를 하고, AHEC(American Hardwood Export Council)에서 ‘세계의 가구 디자이너’로도 선정됐다.

 

“너무 빠른 성공이 아니냐?”고 했더니 “나보다 감각이 뛰어난 사람도 많지만, 그들이 이 판에 뛰어들지 않는 바람에 가능했다”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미대에서 시각훈련을 받아온 데다 한옥을 지으면서 계속 나무를 만져 ‘나무의 성질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가구를 만들 줄 알았기 때문’이라며. 나무의 아이덴티티와 역사인 옹이와 나뭇결을 가장 자연스럽게,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그의 가구를 보고 “나무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고 했더니 그는 “특별한 애정은 없어요”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김형경 소설에 ‘자연을 좋아하는 것은 인간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는 그 무엇 때문’이라는 구절이 있어요. 누구든 자연을 좋아하게 되어 있는 거니까, 나도 보통사람 정도로 좋아하는 거지요”라면서. 그의 가구가 소박하면서도 빛나 보이는 것은 시각적 비례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황금비례라는 비너스의 몸매가 아름답게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 부분이 1mm만 두껍거나 얇아도 비례가 깨집니다. 그런 것은 불 때 버리지요. 아깝다는 생각에 다른 사람에게 주거나 싼 가격에 팔면 스스로의 가치를 지킬 수 없으니까요.” 

최근에는 수입 가구점들이 즐비한 청담동 명품거리에 ‘내촌목공소 서울’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그의 가구를 파는 곳이 생겼다. 한 점당 수백 만 원. 그의 가구에 열광하는 마니아도 높은 가격 때문에 선뜻 구입하기는 어렵다. 이제까지는 주로 대기업 집무실이나 회의실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는 “돈 버는 것도 제 작업의 중요한 일부분”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제가 목수하면서 세속적, 사회적으로도 성공해야 ‘저렇게 전망이 있으니 내 자식도 목수를 시켜야겠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겠습니까?”라고.

그는 이제 다시 집을 짓겠다고 한다. 옛집 형태 그대로를 이어받은 한옥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 맞는 한옥을 제시해 보겠다고. 그러면서 “집과 그 안의 가구까지 한꺼번에 만들어서 팔 생각”이라고 한다. 비합리적으로 짜 놓은 틀을 강요하는 학교 생활을 견딜 수 없어 고등학교를 자퇴했다는 그. 어린 나이에 이리저리 부딪히며 사회를 경험하다 대학에 진학했다는 그는 사회적 통념을 뒤집는 시도를 끊임없이 할 것 같다.

사진 : 문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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