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경해석의 기본원칙

성경이야기 2019. 7. 14. 12:17

성경해석의 기본원칙 (김명도 교수)

참다운 성도라면 누구나 성경은 하나님의 정확 무오한 말씀으로 믿는다.
그런데 같은 성경을 놓고도 서로 해석하는 원칙이 다르기 때문에 혼란이 오고 논쟁이 악화되고 심한 경우는 성경해석의 차이에서 오는 다른 교리로 인하여 가정이 파괴되는 일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는 심각한 문제이다. 그래서 오늘은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가장 기초적인 상식을 말씀 드리고 저 한다. 

사람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사람의 머리로 판단해서 믿으려고 하지만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유는 유한한 인생이 무한한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지식과 지혜가 제한된 인간이 지식과 지혜가 무한하신 하나님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죄로 인하여 타락한 심성을 갖고 있는 인간이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을 판단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불완전하여 실수 할 수 있고, 하나님은 완전하여 실 수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인간이 제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도 인간의 머리로 인간의 지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판단할 수 없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누구도 이에 반박할 수 없다. 성경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 판단하는 사람의 지혜와 지식과 거룩함이 하나님보다 앞서야 하는데 그런 인간은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므로 실 수 할 수가 없고 피조물인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실수를 한다. 유한한 인간이 영원한 하나님의 일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이다. 

성경은 스스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 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딤후 3:16 말씀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강동으로 된 것으로” 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란 말은 원어인 헬라어 원문에서는 “theopneustos" 라는 한 단어로 되어 있는데 그 의미는 ”하나님이 입김을 불어 넣었다“ 라는 의미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입김을 불어 넣어서 기록했다는 말이다. 또한 베드로후서 1:21에 보면, “성경은 사사로이 기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받아서 기록했다“ 라고 말한다. 우리가 생각하기는 성경도 다른 수많은 종교의 경전과 같이 어떤 철학자가 도덕이나 윤리를 전할 목적으로 좋은 말씀을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성경은 결코 그런 철학자들이 인생의 도덕이나 윤리를 논하기 위해서 기록된 종교서적이 아니다. 성경은 그들 경전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성경기록자들은 자기의 말을 기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기록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성경 밖에서 입증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분명한 성경자체의 증거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불완전한 인간의 힘으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입증하고 싶어 한다. 이것을 16세기 종교개혁을 단행한 Martin Luther 는 “Theology of Glory” 라고 불렀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기 힘으로 무엇인가를 해내어 자기의 만족을 채우려는 인간의 노력을 말한다. Luther 가 신학자를 보는 관점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Theology of Cross” 이고 다른 하나는 “Theology of Glory” 이다. “Theology of Cross ” 는 십자가 앞에서 자기 자신이 죄인 됨을 깨닫고 주님에게 굴복하고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태도이고 “Theology of Glory” 는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기 힘으로 무엇을 해서 자기만족을 채우려는 노력이라고 했다. Luther 의 기준으로 보면 오늘 기독교계는 대부분 “Theology of Glory” 에 해당할 것이다.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를 내세우기를 좋아하는가?

그러면 성경이외에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입증할 수 있는가? 그것이 가능한가? 이들은 주로 고고학적 발굴 자료에 의존한다. 그중 유명한 것이 1930년대에 발견된 이른바 “나사렛포고령 Nazareth Decree" 라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지 얼마 안 되어 로마에 있는 교회에서 예수님의 육적부활을 믿는 유대인들과 예수님의 부활이 허구라고 믿으며 제자들이 주님의 시체를 훔쳤다고 믿는 유대인들 간에 충돌로 시끄러워지자 당시 로마의 Claudius 황제가 유대인들을 모두 로마에서 추방했다. 이때 고린도로 들어온 사람들이 아굴라와 부리스가 내외였다. 이것은 사도행전 18장에서 읽어 볼 수 있다.

그런데 “나사렛포고령” 이라는 것은 Claudius 황제가 명령한 칙령으로 “예수를 믿다가 죽은 사람의 무덤에는 손대지 말며 만일 이런 무덤을 훼손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라는 일종의 묘지법이다. 사방 1 foot 의 흰 대리석으로 된 이 원본은 지금 프랑스 파리의 Louvre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그 사본은 지금 이스라엘 북방 지중해 해변 가이사랴에 가면 바울이 벨릭스 각하에게 재판받던 원형극장이 있는데 그 원형극장 바로 앞에 갈색으로 된 모조품 (replica) 이 서 있다. 그러므로 이 문헌은 예수님의 부활을 입증하는 중요한 자료라고 고고학자들은 생각하고 있다. 

또 한 가지 고고학적 문헌은 1976년에 발견된 이른바 “에불라 문헌 Ebla Tablets" 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북방 지금의 수리아 Hammath 라는 곳에 있는 높은 언덕에서 발견된 이 문헌은 기원전 22세기에 한창 창성하던 당시의 Ebla 왕국의 왕립도서관에 소장되었던 17,000 장의 토판인데 이태리 로마대학의 Giovanni Pettinato 교수가 판독한 바에 따르면 이 문헌 중에는 에불라 왕국과 소돔과 고모라 성이 교역하던 내용의 문서들이 있는데 아브라함의 이름도 나오고 ”살렘“ 이라는 이름도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 성이 실제 존재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신학자들 중에는 소돔과 고모라는 실재하는 곳이 아니고 가상 도시였다고 믿고 있었는데 이 문헌의 발견으로 성경의 진리가 다시 한번 입증되어졌다. 한 가지만 더 말한다면 오랫동안 자유주의자들 중에는 헷 족속의 유적은 고고학적 발굴에서 찾을 수 없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헷 족속은 실제로 존재하던 부족이 아니고 가상적인 부족이 라고 믿고 있었고 독일의 신문기자로 있던 Werner Keller 라는 사람도 그렇게 믿고 있었으나 1940년대 고고학 발굴을 취재하기 위해 그가 발굴 팀을 따라가서 헷 족속의 근거지를 발견하게 되어 감탄한 나머지 책을 썼는데 그 책의 이름이 Die Bibel als History 역사로서의 성경이라는 책이며 미국 뉴욕의 William Morrow Co에서 1950년도 초반에 영문으로 번역하여 The Bible as History 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한 바 있다. 그 책 서문에서 저자 Keller 는 “누가 아무리 성경을 믿을 수 없다고 해도 성경은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임이 지금도 내 귀속에 방맹이질 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것은 모두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입증하려는 노력이지만 성경은 성경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분명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입증해 준다. 확실히 알 수 있는 정보를 놓아두고 다른 근거를 찾으려는 것은 죄악 된 인간의 심리이며 Martin Luther 가 말하는 “Theology of Glory” “vain glory 심리에 기인 한다

성경은 스스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증거 한다. 하나님에 관한 말씀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계시한 말씀인 것이다. 스위스의 신학자 Karl Barth 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증거가 아니다. 그는 말하기를 그 말씀은 내가 이성으로 받아 드릴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진실은 우리가 받아 드리건 말건 성경은 객관적으로 영원히 불변하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것이다. Barth 가 받아 드리건 말건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성경기록자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각자의 죄성은 없이하면서, 그리고 자기의 성격과, 학식과, 언어와, 문화적 배경, 취미 등을 그대로 살리면서, 하나님이 영감을 주시어 하나님의 뜻대로 성경을 기록하게 하였다 이것을 유기적 영감설이라고 하고 영어로는 organic inspiration 이라고 한다. 어떤 분은 “기계적인 영감설” 을 주장하면서 성경기록자들은 마치 로봇트 처럼 아무 생각도 없었고, 하나님이 불러 주는 대로 적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잘못인데 그 이유는 그렇다면 성경의 문체(Literary style) 가 왜 모두 서로 다른지 설명이 안 된다. 가령 요한복음은 문체가 간단하고 단문이나 중문이 많다. 복문은 적다. 반면 누가복음 은 복문이 많고 단어도 어려운 단어가 많다. 구약도 아사야서의 문체와 에스더서의 문체가 다르다. 기계적인 영감설로는 이런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유기적인 영감설로만 설명할 수 있다. 

성경은 보통 책과 다르다. 성경은 40명 이상의 서로 시대가 다르고 학식과 성격과 직업이 다른 사람들이 1500년에 걸쳐서 기록한 책인데 내용은 모두 한가지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을 가르쳐준다. 세상에 많은 종교 중에 인간이 어디서 왔는지 알려 주는 종교는 유대교와 기독교외에 없다, 기독교가 유대교에서 파생했지만 유대교는 기독교를 배척한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신약성경이 없다 그들의 성경은 TANAK 라고 해서 구약의 39권을 22권으로 나눈 구약만 있다. 성경은 죄로 인하여 죽게 된 인간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알려주는 하나님의 특별 계시의 말씀이다. 신구약 66권이 모두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을 분리할 수 없으며 하나의 일관성(cohesiveness)을 가지고 있다. Augutine 이 말한 것처럼 The New Testament is concealed in the Old and the Old in the New revealed 라는 말이 맞는다. 신약을 모르고 구약을 모른다. 흔히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이므로 신약이 완성된 다음부터 구약은 필요 없다고 가르치는 분들이 있지만 잘 못이다. 

가령 구약이 없다면 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하는지 모른다. 구약 신명기 21장23절에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 라고 했고 신약성경 갈라디아 3:13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려 돌아가셨다” 고 한다. 세례는 구약의 할례와 같은 것이며 성찬식은 구약의 유월절과 같다. 구약을 모르고 어찌 이해할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 얼마나 많은 구약성경 구절을 신약 특히 마태복음에 인용하고 있는가를 보라 그러면서 요 5:46에 “모세가 나를 증거하는 것” 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알려면 모세를 알아야 하고 모세를 안다는 말은 구약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악을 분리하거나 지금은 신약이 완성되었으니 구약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일등은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10장11절이나 로마인서 15장에 4절에 보면 “전에 가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라” 고 말하고 있다. 구약은 절대로 버릴 수 없고 신약과 구약은 똑같은 권위를 가진다. 구약은 “언약의 약속”이고 신약은 “언약의 성취” 이다. 기독교의 계시는 “점진적 계시(progressive revelation)" 이다. 마치 방안에 불이 켜질 때 점점 밝게 켜지도록 조종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시를 한꺼번에 모두 주신 것이 아니고 점진적으로 자기를 나타내 주셨다.

야곱이나 다윗에게는 부인이 많았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엡 5:22 절 이하에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말하고 있다. 이혼도 마찬가지이다 신명기 24장1절에는 이혼을 허락하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 마태복음 19장 7절 이하에서 "이전에는 백성들의 마음이 악하여 임시로 허락했던 것이고 본래는 그렇지 않다" 고 8절에 말한다. 먹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비늘이 없는 고기나 발굽이 갈라지지 않은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그런 제한이 없어졌다. 골로새 2:16-18에 보면 그리스도가 모두 십자가로 의식법을 철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우선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하나님이 바로 그 저자이시고 디모데후서 3:16절 말씀대로 하나님이 “입김을 불어넣어서” 기록했지만 그 기록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옛날 독일의 신학자였던 Richard Rothe 라는 사람은 성경의 언어는 이상하여 어느 헬라의 학자의 언어와도 다른 이상한 말이라고 해서 이 세상 어떤 사람도 알 수 없는 “하나님만 아는 말” 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는데 그런 것이 아니고 성경의 언어는 인간의 언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구약은 당시 히브리인들의 모국어인 히브리어로 대부분 기록되었고 극히 적은 부분이 아람어(Aramaic)로 기록되었고 신약의 경우는 모두 헬라어로 기록되었는데 헬라어는 크게 고전적 헬라어와 평민의 헬라어로 나누어진다. Classic Greek 이 있고 Hellenistic Greek 혹은 Koine Greek 이란 헬라어가 있다. 신약성경은 Socrates, Plato, Aristotle, Polybius, Xenophon, Sophocles 같은 인물이 즐겨 쓰던 고전적 헬라어가 아닌 시장에서 평민들이 사용하던 Koine Greek 혹은 Hellenistic Greek 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이 방면에 연구를 많이 한 사람은 Adolf Deissmann 이고 그 뒤를 이어 George Miligan, James Moulton, A.T.Robertson 같은 분이다. A.T. Robertson 은 미국 남 침례교 목사인데 20년간 연구하여 2,000 면에 달하는 큰 책 A Grammar of New Testament Greek in the Light of Historical Research 라는 대작을 1922년에 출판했다. James Moulton 도 4권짜리 Grammar of New Testament Greek 이라는 책을 영국 Scotland의 T.&T Clark 출판사에서 1940년경에 펴냈다. 

성경의 언어가 인간이 알아듣지 못하는 그런 언어가 아니고 기원 1세기 신약성경이 기록될 당시 일반이 가장 널리 사용하고 있던 평민의 헬라어라는 점을 말씀드렸지만 그렇다면 성경을 기록함에 있어서 기록방법은 어떠했을까? 성경기록자들은 누가를 제외하고는 무두 유대인들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언어습관, 언어 어법과 유대인들의 관습, 속담, 유대인들이 사고방식 등이 성경에 그대로 나타난다. 이것을 무시하면 성경해석상에 이상한 문제가 발생한다. 예를 들면 로마인서 12장20절에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게 하라 그리하므로 그의 머리에 산 숯불을 얹으리라” 라는 말이 있는데 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큰 일 날 것이다. 어떻게 산 사람의 머리 위에 산 숯불을 얹을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유대인의 관습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우리나라 속담에 “미운 놈 떡 한 개 더 주어라” 라는 말이 있듯, 유대나라에도 속담이 있다. “나를 괴롭히고 핍박하는 사람들을 후히 대하라” 라는 내용을 유대인들은 “저 사람 머리위에 산 숯불을 얹어 주어라” 라는 식으로 표현한다. 

또한 마태복음 24:28절에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 떼가 모일지니라” 란 말도 별 신학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말에 “바늘 가는 곳에 실 간다” 란 말이 있다. 같은 말이다. 언어에는 수사학이 있으며 영상법도 있고 상징적 표현도 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직유법과 은유법, 영상법을 보면 이런 것들이 있다. <불꽃 같은 눈동자로>, <병아리 나래 아래 품듯> , 이런 말들이 직유법이고 은유법은 누가복음 13:32에 나타난 ‘여우“ 처럼 또는 요한복음 1:29에 보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이라고 했는데 ”양“ 은 은유법으로 예수를 가리키는 말이다. 

또 성경에는 다른 문학서적 처럼 영상법을 통해서 말씀하기도 한다. 이것은 특히 묵시 문학(Apocalyptic Literature)에 많이 나온다. 가령 바다에서 올라오는 <머리가 일곱이요 뿌리가 열인 짐승> 같은 것은 사탄이 악함을 나타내 주는 영상표현법이다 (계 13:1). 144,000 같은 숫자는 문자 그대로의 수가 아니라 상징적인 숫자 로 <구원 얻은 자 전체>를 말함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할 때 이런 일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이상한 결론에 도달한다. <붉은말> 은 쏘련이고 <흰말> 은 미국이라고 해석 하는 따위는 성경해석을 그르치는 좋은 예이다. 성경에는 성경해석의 원칙이 있다. 성경해석의 원칙을 따르지 아니하면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결과가 된다. 

성경이 왜 헬라어로 기록되었을까? 헬라어로 신약성경이 기록된 이유는 모든 언어 중에서 헬라어는 가장 문법이 정확하고 바른 뜻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엡 2:8에 <우리가 믿음을 통해서 은혜로 구원을 얻었나니> 라는 대목에서 <구원을 얻었나니> 라는 말은 <완료형 남성 주격 북수 분사> 로 사용되었으니 한번 구원을 얻으면 구원을 잃지 않는다는 성경의 교리가 입증된다. 또한 요한일서 3:9에서 “하나님께로 난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 하나니” 란 대목에서 <죄를 짓지 아니 한다> 는 말은 <직설법 현재 삼인칭 단수 동사> 이므로 <하나님에게로 난자는 상습적으로 계속해서 고의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 는 문법적 설명을 통해서 거듭난 사람은 죄를 함부로 짓지 않는다는 교리가 입증된다. 

종교개혁 이후의 성경해석 방법은 즉 <역사적, 문법적 신학적 해석>이다. 성경구절을 해석할 때, 항상 이 세 가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옛날 Alexandria 에 Origen 이라는 헬라의 영지주의 철학에 물든 신학자가 있었다 그는 성경의 모든 구절은 4가지의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는데 그 네 가지란 <문자적 의미>, <도덕적 의미>. <풍자적 의미>, 그리고 <신학적 의미> 등이다 이것을 Origen 의 <사중해석법 (Origen's Quadruple Interpretation of the Scripture)> 라고 한다. 

예를 들면 그는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구절을 이렇게 해석했다. <거기에 나오는 예루살렘은 교회이고 여리고는 세상이고 강도만난 사람은 교회에서 타락하여 세상으로 나가니 강도를 만났다. 강도는 마귀이다. 레위사람이나 제사장이 지나갔다 구약을 말한다. 구약으로도 그를 돕지 못했다.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를 돌보아 준다. 사마리아 사람은 바로 예수이다. 사마리아 사람이 그 당시 가장 천대시 받듯 예수님은 당시 모든 사람에게서 천대를 받았던 인물이다. 기름을 발라주었다. 예수님이 은혜를 베풀었다. 주막으로 데리고 갔다 주막은 술집, 그 술은 포도주, 포도주를 파는 곳은 교회,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를 교회로 인도했다. 그리고 돈 두 입을 주면서 다시 올 때 까지 잘 보아 달라고 했다. 돈 두입은 구약과 신약이다. 주님이 재림할 때까지 교회가 잘 돌보아 줄 것을 당부했다> 라고 그럴듯하게 해석했다.

이렇게 해석하면서 Origen의 문자적 해석은 문자 그대로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는 것이고, 도덕적 해석은 불쌍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고 퐁자적 해석은 방금 위에서 말한 대로이고, 신학적 해석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 라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지금도 소위 영해 (靈解) 라는 것을 좋아 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성경의 구절은 한 가지 뜻 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자.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 가지 이상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하면 그것은 이미 성경해석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성경은 이 현령 비 현령(耳懸鈴 鼻懸鈴) 이 아니다. 

성경 해석시 문자적으로 해석할 것이 있고, 상징적으로 해석할 구절이 있다. 일률적으로 모든 성경구절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할 수 없다. 가령 요한복음 2:19-20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문자 그대로 46년간 걸려서 지은 성전을 사흘 만에 주님이 재건하신다는 말인가? 아니다. 그 뒤에 계속해서 읽어보면 주님은 그의 몸을 가르켜 하신 말씀임이 들어난다. 

몸이 죽어도 삼일 만에 부활한다는 뜻이다. 요한계시록 11장의 <1260일이니 42달이나 한때와 두 때 반> 이니 하는 말은 모두 상징적이며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요한계시록의 경우는 단 9:27절과 반드시 병행해서 해석해야 한다. 요한계시록 20장1-7절 사이에 6 번 나오는 <천년> 이라는 말은 문자적인가 아니면 상징적인가? 문자적이라면 성경이 기록된지 벌써 1,000년이 넘었으니 문자적이 아님을 금시 알 수 있다. 상징적이다. 우리는 이 숫자가 상징적인 것을 한다. <말세> 란 히브리 1:1이나 베드로전서 1:5이나 1:20등을 통해서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이 말세임을 안다. 그러므로 계시록 20장의 천년은 <문자적 천년>이 아니고<주님 재림 때까지 전 기간을 통한 기간>을 나타내는 상징적 숫자임을 알 수 있다. 

성경 해석 시에 가장 오류를 범하기 쉬운 것은 성경의 문맥을 무시하고 선입견을 가지고 혹은 임의로 해석하는 방법이다. 가령 마가복음 3:29에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금세와 내세에 영영 구원이 없다“ 는 말에서 ”성령을 훼방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목사들, 특히 부흥사들 중에서 이 구절을 오해하는 분들이 예상외로 많다. 심지어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방언 못하는 죄라고 가르치는 목사도 있다. 성경을 해석하는 기본 지식이 없는 사람이다. 문제의 성경구절에서 앞뒤의 문맥 (context)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신 일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본인이 하신 것이 아니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사탄의 이름중 하나) 의 힘을 빌려서 행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때 주님께서 29절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 해석을 믿기 어려우면 성경 마가복음 3장29절 그 다음절인 30절을 보면 의미가 의심의 여지없이 아주 분명해 진다. ”이는 저희가 말하기를 저가 더러운 귀신이 들였다 함이라“ 라고 스스로 설명해 주고 있지 않은가? 이와같이 문맥을 통해서 성경을 해석하라. 성경에 지금 내가 연구하는 구절이 왜 기록되었는지 앞뒤를 읽으면서 문맥을 잡아라.

이와 같이 성경은 항상 문맥을 통해서 해석해야 한다. 영어로는 “A text without a context is a pretext” 라고 한다. “문맥을 보지 않고 해석하면 궤변이 된다” 는 말이다. 얼마나 많은 설교자가 문맥을 무시하고 스스로 억지로 풀다가 이상한 교리를 만들어 내는가 우리들 주위에서 사이비 목사들을 보라, 주님은 우리에게 경고하신다. “너희중 지극히 적은 소자 하나 라도 실족케 하면 큰 연자 돌을 목에 달고 깊은 물에 빠져 죽은 편이 낫다” 고 마태복음 18장6절에 엄하게 경고하신다. 바른 성경해석으로 바른 복음을 전해야 한다.

앞서 성경해석 원칙은 <역사적 문법적, 신학적 방법>을 사용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종교개혁의 성경해석 방법이다. 어떤 성경구절을 해석할 때 우선 역사적인 배경을 공부해야 한다. 어떤 시대적, 정치적, 종교적 배경 속에서 이 성경구절이 기록되었는가를 본다. 이것을 알려면 Halley의 성경핸드북도 좋고 Hendrickson 이 쓴 성경 개관 Bible Survey 도 좋고 성경의 배경을 다룬 참고서들을 읽어보면 좋고 만일 그럴 재정적 여유가 없으면 그 성경구절이 들어 있는 성경 앞뒤를 계속해서 주의 깊게 읽어본다. 그래도 모르겠으면 그 책의 처음부터 읽는다. 

가령 마가복음은 어떤 문화적 정치적 환경 속에서 기록되었는가? 하박국은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기록되었는가? 학개서는? 등을 연구한다. 마가는 로마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기록되었는데 예수님의 섬기는 종 됨을 기록하면서 가장 간결하고 명료한 문체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안다. 학개서는 유대인들이 포로생활에서 돌아와서 성전 수축을 등한히 하고 개인의 가옥 수리만 열중인 유대백성에게 하나님은 학개 선지를 통해서 성전 수축을 명하는 배경이고 하박국은 하나님을 모르는 나라는 잘 되어 가는데 하나님의 백성은 왜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그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선지자 하박국이 <결국은 아무리 핍박을 받고 어려움을 당해도 의인은 믿음으로 살고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 한다> 는 내용을 알아 두어야 한다. 

역사적 배경을 알게 되면 다음은 골치 아픈(?) 문법적인 면을 해석해야 하는데 이것은 일반 평신도로서는 어렵다. 이유는 원어를 모르기 때문이다. 원어를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이다. 그래서 신학생들은 코피를 쏟아가며 매일 그 어려운 헬라어와 히브리어, 라틴어를 공부한다. 그러나 일반 성도도 열심만 있다면 집에서 능히 헬라어를 자습할 수 있다. Princeton 신학교 신약학 교수였던 J. Gresham Machen 박사가 쓴 신약헬라어 입문 같은 문법책을 사서 스스로 매일 아침 조금씩 헬라어를 터득해 갈 수 있다. 구약의 히브리어도 공부해야 하지만 히브리어는 그 언어의 체계가 헬라어와는 전혀 다른 어족(語族) 인 <셈어족, Semitic Language> 에 속하여 일반 평신도가 공부하기는 심히 어려울 것이고 헬라어만 공부해 두어도 구약은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해 둔 칠십인역(七十人譯)이라는 책이 있으니 그 LXX (칠십인 역 성경을 나타내는 기호) 를 헬라어로 읽으면 헬라어만 알아도 신학 공부를 엉터리로 마친 웬만한 목사 보다 더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다. 

문법적인 해석의 좋은 예는 요한복음 3:16이다. 많은 분들이 “그를 믿으면” 이라고 해석하지만 문법적으로 그것은 그릇된 해석이다. 원문은 <믿고 있는 모든 사람> 은 즉 의 의미이다. 요한일서 3:9에서도 "하나님께로서 난자는 죄를 짓지 아니 하나니" 에서 <죄를 도모지 짓지 않는다> 라는 말이 아니다. <죄를 상습적으로 짓지 아니한다> 는 의미이니 헬라어의 문법에서 <직설법 현재 형으로 부정문> 이니 <상습적으로 무엇을 계속 하지 않는다> 는 말이 된다. 엡 2:8에서도 “구원을 얻었나니” 에서도 <완료형 분사> 이므로 <한번 구원을 얻으면 영원토록 변치 않는다> 는 뜻이 헬라어의 완료형 의 성격에서 입증된다. 

신학적 해석은 그 성경구절의 앞뒤를 보아서 신학적으로 이 말이 무슨 교리를 가르치는가 를 연구한다. 가령 요 3:16을 보면 처음에 “사랑하사” 라는 말이 먼저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속에서 <사랑>의 개념이 앞선다는 것을 안다. 그 다음 부분은 <주사 ,아들을> 이렇게 시작된다. 그러므로 <그 구속은 아들 예수에 의해서 이루어짐>을 안다. 성경의 다른 곳을 통해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믿음이란 우리가 스스로 믿게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안다( 엡 2:8) 고로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누린다> 는 내용이니 <그리스도의 구속의 가장 기본 교리> 를 터득할 수 있다. 

이제 중요한 부분을 말하고 저 한다. 성경을 해석할때 주의할 것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특별은사 혹은 임시 은사> 이다. 이런 은사는 성경기록이 완성 될 때까지 하나님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역사하셨다. 히브리 1;1 이나 WCF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에 보면 이런 방법이 성경완성과 함께 지금은 끝났다고 가르쳐 준다. 이것을 <계시의 종결> 이라고 한다. 개혁주의는 계시의 종결을 믿는다. 지금은 하나님이 옛날 성경기록 당시처럼 그렇게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역사하지 않으시고 기록된 말씀만 가지고 역사하신다는 것이 개혁주의 신앙의 골자 이다. 종교개혁가들은 이라고 외쳤다. “오직 성령” 이 아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중거 한다 (요15:26). “오직 성경“이란 말 가운데는 ”성경의 충족성, Sufficiency of the Bible" 이 들어 있으을 알자.

둘째로, 성경에 나오는 <이적> <기사> 를 모방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성경기록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초자연적 이적이나 기사를 모방하려한다. 가령 죽은 사람을 장사하지 않고 3개월 동안 놓아두고 살아나기를 기다리면서 계속 기도한다든지 병든 자를 고치기위해서 약을 쓰거나 병원에 가지 않고 기도만 한다든지 하는 일은 성경해석의 원칙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예수님이 하셨으니 나도 할 수 있고 내가 해야 한다“라는 말은 위험한 발상이다. 가령 예수를 모방한다면서 채찍에 노끈을 매어 잘 못 하는 교회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마구 내 보내고 강대상을 뒤집어 엎을 수 없다. 주님이 그렇게 했다고 해서 우리가 그렇게 할 수는 없다. 흔히 이런 말을 한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라고 하지만 그것은 잘못 된 질문이다. 예수는 조물주인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다. 그가 하는 일을 우리가 모두 할 수는 없다. 예수님의 기적과 이적은 항상 구원과 관계가 있다. 구원의 성질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려는 목적이 있다. 오히려 이렇게 묻는 것이 당연하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기를 원하실까? ” 라고. 

셋째로, 성경해석은 어디까지나 <성경을 성경으로 푸는 것 Scripture is interpreted by Scripture> 이며 <환상>이나 <계시> 이나 <경험>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늘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런 오류에 빠지고 있다. 성경구절의 의미는 처음에서 끝까지 성경자체에서 그 바른 의미를 찾아야 한다. 모든 성경이 모두 일률적으로 뜻이 명확하지 않다
잘 이해하기 어려운 어두운 부분은 밝은 구절 즉 확실히 알 수 있는 구절에 비추어서 해석한다. 이것이 성경해석의 방법이다.

성경해석이나 신앙생활에서 인간의 경험은 가장 위험하다. 경험은 사람마다 각자 다르다. 누구의 경험이 옳은가? 성경해석은 경험이나 계시에 의존해서는 절대 안 되며 성경에서 답을 찾고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종교개혁가들은 이 점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부디 우리 모두 바른 성경해석으로 바른 말씀을 전하여 이 다음 그리스도 앞에 설때에 다른 복음을 전했다고 책망을 받지 않도록 주의 하자. 오늘 <성경해석의 기본 원칙> 이라는 주제의 강의를 마치고저 한다.


'성경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0) 2019.07.14
출애굽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0) 2015.06.03
성경을 배우는 목적  (0) 2015.06.03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성경이야기 2019. 7. 14. 08:22

예수를 믿는다는 것 (김성수 목사)

신명기 28장 15절
1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16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사도바울이 이 신명기 28장 16절의 이 단어를 끌어다가 자기의 삶을 설명해요
예수님이 저주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이사야서 53장의 그 내용이 그거잖아요.

채찍에 맞고,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아났다~에서 그 저주의 삶,
이게 신명기 28장의 그 저주의 삶이었는데

그런데 그 삶이 그대로 내 삶에 나타나더라를 설명하는 거예요.

내가 진짜 하나님의 사도 맞어~ 내가 성도 맞어~ 라고 이력서를 쓰는데
이게 성도의 증거라는 뜻이에요.

성도의 증거가 뭐냐면
하나님의 저주 아래에 있는 자,
그래서 결국에는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는 그 삶을 증거로 내놓더라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내가 그 삶을 살았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럼 보세요.
신명기 28장의 그 내용들이 니네 율법 잘 지켜~ 그럼 복 주게~ 이 내용이에요?
아니 니들은 이 세상에서 율법의 저주, 그 저주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삶을 살게 될 거야~
그거 이야기해 주는 거예요.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고
한 길로 들어왔다 일곱 길로 도망가고 머리가 될 지언정 꼬리가 될~
이게 다 신명기 28장에 나오는 그 목록이거든요.

그거 여러분 냉장고에 적어 놓는다는 건 나 예수 안 믿고 이 땅에서 복 받고 지옥 갈 테니까. 하나님 나 지옥 보내세요.
이 말과 똑같은 거예요. 무서운 거예요. 그거 지우세요. 가서. 떼어 버리세요.

여러분은 이 땅에서 복을 받고 이 땅에 육을 살찌우는 삶을 살게 되면 절대 하나님 나라 못 들어가요.
저주 받아, 죽어야 들어간다니까요.

여러분 안에서도 율법이 완전케 이루어진다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구약의 율법은
지키라고 준 게 아니라 지킬 수 없음을 깨닫고
그것을 지키지 못했을 때에 저주를 몸으로 받아 내면서
육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라는 목적으로 주신 게 맞는 거예요.

은혜 붙들어라~ 예수 믿어라~
간단하게 말해서 예수 믿어라~ 다른 거 없다. 예수 믿어라~

말씀 전체가 ...율법과 선지자 말씀 전체가 다 그 의미로 주어진 거예요.

예수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시기 위해
육을 부정당하고 십자가에 그 육을 매다신 것처럼

우리에게 그 말씀이 완료로 침노해 들어오게 되면...
우리도 역시 십자가에 매달리는 삶으로 끌려가게 되는 거예요.
그게 말씀대로 사는 거예요.

말씀에 의해, 법에 의해 끌려가는 삶. 이게 말씀대로 사는 거예요.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열심히 죽으시고 열심히 부정당하세요.


'성경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경해석의 기본원칙  (0) 2019.07.14
출애굽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0) 2015.06.03
성경을 배우는 목적  (0) 2015.06.03

출애굽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경이야기 2015. 6. 3. 13:47

출애굽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1. 모세오경 가운데 출애굽기의 위치

 

 

출애굽기는 탈출이란 뜻의 엑소더스라는 헬라어 때문에 붙여진 제목입니다.

하지만 출애굽기라는 제목 하에서 본다면 사실 출애굽기는 18장까지면 족합니다.

18장까지 탈출이 완료되거든요.

그런데 이 탈출은 노예해방 같은 자유쟁취가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구원해 내신 것입니다.

그 목적은 19장에 나와있고그것은 언약식입니다.

출애굽기를 다시 설명해보자면

언약을 맺을 백성을 구원해 내셔서

십계명과 레위기를 가지고서 언약식을 맺고

그 언약한 백성 가운데 성막을 짓게 하셔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내용을 담은

성경책이라 할 것입니다.

 

 

 

2. 저자

 

출애굽기는 모세의 기록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모세가 지금의 출애굽기로 정리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창세기를 정리한 성령에 감동된 자가

모세가 남긴 출애굽기 내용을

지금의 출애굽기로 정리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과정에서 꼭 인정해야할 것은 기록을 남긴 모세나 정리했을지도 모르는 성령에 감동된 또 다른 이도 다 성령께서 감동하셨다는 사실입니다.(딤후3:16)

 

 

 

3. 출애굽기의 구성

 

 

출애굽기는 단순하게 기록되었습니다.

내용상 다섯가지로 구분되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사람 준비하심입니다.

둘째는 10가지 재앙을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

셋째는 출애굽

넷째는 언약식

다섯째는 성막준비와 하나님의 임재하심입니다.

 

 

 

4. 하나님의 사람 준비하심(출애굽기1장-4장)

 

 

하나님께서 모세라는 사람이 준비되기까지 기다리시는 과정입니다.

모세는 출생하면서 예수님처럼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처음 40년은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최고의 학문과 영예를 누렸습니다.

그후 40년은 초라한 망명자로서 처가살이에 처가의 양떼나 돌보면서 살아야했습니다.

맨날 양떼만 돌보면서 살다보니 나중에는 사람들과 말을 나누는 것도 버거워할 정도에까지 이릅니다.(출4:10)

그후 40년은 이스라엘 민족을 탈출시키고 광야에서 그들을 교육하면서 살았습니다.

모세는 40세까지는 자신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을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후 80세까지는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후 생애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하시면 못하실 것이 없는 분임을 알았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을 통하여

위대한 일을 하신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모세는 위대한 지도자이고 십계명과 레위기 등 율법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모세는 지면에서 사람들 중에 가장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가 그토록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었고 온유할 수 있었던 것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 훈련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인격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꾸준히 훈련해가야 합니다.

위대한 지도자 모세도 40년의 미디안 훈련이 있었기에 그가 될 수 있었음을 우리는꼭 알아야 합니다.

후세의 신명기서를 정리하신 분은 성령의 감동으로 평가하기를

선지자 중에 모세와 비교할 분이 없다고까지 칭찬합니다.(신34:10-12)

 

 

모세는 군사로 쓰임받을 사람만 60만이 넘는 엄청난 대군을 지도하고 이끌었던 지도자입니다.

지금도 세일산이나 광야를 다녀오신 분들은 한결같이 말하기를

모세가 아니면 그 누가 이 험한 광야길을 그 엄청난 무리를 이끌고 40년동안이나 지도할 수 있었겠는가 합니다.

정말 모세가 아니면 안되었기에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70명으로 시작된 이스라엘 백성은 400년 동안 이집트(애굽)에서 지내면서 심히 번성하지만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맨처음 요셉 까닭에 이스라엘민족에게 호의적이었던 왕조가 몰락하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서

그 새로운 왕조에게는 숫자가 많은 이스라엘민족은 최대 숙청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출1:8-10)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노예로 전락하게 되고

심지어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죽임당하는 무참한 일을 겪게 됩니다.

이 일은 모세가 태어날 무렵에 시작되어서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하기 전까지 계속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 세월이 무려 80년 이상입니다.

이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이스라엘 민족의 어린이들이 숙청이라는 명분으로 죽임을 당하였을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일하실 수 없었습니다.

정말 헌신된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전능한 하나님이시지만 일하실 수 없습니다.

모세가 준비될 때까지 이스라엘 민족은 끔찍한 노예생활을 계속해야 했습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무나 붙잡고 일하지 않습니다.

400년만에 모세가 준비되자 출애굽사건이 일어납니다.

다시 400년만에 사무엘이 준비되자 이스라엘민족에게 암흑기가 끝나고 새로운 기회가 주어집니다.

에스라가 준비되자 오늘날의 구약성경은 정리됩니다.

말라기 이후 400년 동안 세례 요한이 준비될 때까지 선지자가 나타남이 없었습니다.

중세 로마카톨릭의 1000년 부패는 마틴 루터가 나타나서야 고리가 끊어집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준비되지 않으면 일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로봇이나 부품 취급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정하는 사람 만나기를 고대하시는 것입니다.

 

 

 

5. 열가지 재앙을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출애굽기 5장 - 10장)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그냥 크신 능력으로 바로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열가지 재앙을 통하여 먼저 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리시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 형 아론과 함께 바로를 찾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하자

바로는 말하기를 여호와가 누구관대 합니다(출5:1-2)

이스라엘 백성도 400년 동안 애굽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잊어버렸고

애굽사람들도 하나님을 알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대화는 당연한 결과였을 것입니다.

 

 

이후 열가지 재앙은 한결같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용되어 집니다.

5장부터 10장까지 가장 많이 사용된 반복적인 말은 “나는 여호와로라”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입니다.

 

 

출 6:2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출 6: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출 6:7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지라

출 6:8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

출 6:2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바를 너는 애굽왕 바로에게 다 고하라

출 7:5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매

출 7:17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니 네가 이로 인하여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느니라 볼지어다 내가 내 손의 지팡이로 하수를 치면 그것이 피로 변하고

출 8:10 그가 가로되 내일이니라 모세가 가로되 왕의 말씀대로 하여 왕으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같은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니

출 8:22 그 날에 내가 내 백성의 거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곳에는 파리떼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나는 세상 중의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출 9:14 내가 이번에는 모든 재앙을 네 마음과 네 신하와 네 백성에게 내려 너로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알게 하리라

출 9:29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성에서 나가자 곧 내 손을 여호와를 향하여 펴리니 그리하면 뇌성이 그치고 우박이 다시 있지 않을지라 세상이 여호와께 속한 줄을 왕이 알리이다

출 10:2 너로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 가운데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출 12:12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애굽사람들에게도 그리고 바로에게도 하나님 여호와이신 것을 알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재앙을 당하는 사람은 당하면서 하나님을 알게되고 피함을 받은 자는 그러함으로 하나님을 알게됩니다.

오늘 우리들도 어려움을 당하면서 하나님을 알게되기도 하고 피함을 입으면서 하나님을 알게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출애굽 자체가 목적이라면 이런 열가지 재앙은 필요없는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열가지 재앙을 통하여 출애굽할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리셨고

애굽사람과 바로왕도 사랑하셔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그들이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시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대하신 것입니다.

 

 

 

6. 유월절 준비와 출애굽(출애굽기 11 - 15장)

 

사실 출애굽은 하룻밤만에 이루어집니다.

80년 세월 동안 모세가 준비되고

10가지 재앙을 내리고

유월절 준비까지 하게하시지만 사실 일은 아주 짧은 시간에 이루어져 버립니다.

 

 

100m 달리기 선수들은 10초 이내로 달리기 위해서 수많은 준비를 합니다.

15일간의 올림픽을 위해서 4년을 준비합니다.

준비만 잘되면 일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 준비되고 하나님을 알리시는데 시간이 걸리지 본게임은 간단히 끝납니다.

 

 

이 유월 때문에 사람이나 짐승의 초태생 구별 규례가 주어집니다.(출13:1)

유교병 대신에 무교병을 먹으라 합니다.

사실 유월절 당시에 언제 떡을 발교시킬 시간이 없었습니다.

유월절에는 유교병을 먹지말고 무교병을 먹으라는 이유는 기념에 있습니다(출13:3)

바울은 이 누룩 넣은 유교병을 안먹고 무교병을 먹는 유월절 의식을 가지고

고린도교회에 있는 성적 부도덕자를 권징하라는 것으로 연결하여 권합니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고전5:1-8)

 

 

1년된 흠없는 어린 수양이나 수염소를 잡아서 그 피를 바르고 고기를 먹되 쓴나물과 무교병과 함께 먹고

고기는 구워 먹으라 합니다.

그리고 고기의 뼈는 꺽지 말라고 하죠.

이 수양은 유월절 하루 전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고전5:7)

유월절 예식에 참여할 수 있는 자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할례를 받은 자에 한하였습니다.(출12:43-51)

이 유월로 인하여 유대인 뿐만 아니라 애굽에서 노예생활하던 다른 많은 민족들이 함께 애굽을 탈출하였습니다(출12:37-38)

 

 

이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지킬 영영한 규례입니다.(출12:14)

이는 예수님께서 구원사역을 다 이루시고서는 영영한 규례의 의미는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 가서 다시 저희 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4:8-11)

 

 

출애굽은 홍해를 건너가서야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유월절은 애굽에서 나오는 기회가 되었고 애굽의 다스림과 손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홍해를 건너고 나서입니다.

애굽의 바로는 그의 군대가 홍해에서 몰살하자 더 이상 이스라엘 민족을 쫓는 것을 포기합니다.

그래서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민족은 완전한 해방을 확인하고서 노래를 부릅니다.(출15:1-21)

이를 모세의 노래라 합니다.

이 모세의 노래는 요한계시록에서

성도들이 재림하신 예수님을 만나 불이 섞인 유리바다(색깔이 붉은 바다 = 홍해에서 따온 이미지) 건너편에서

더이상 자신들을 좇아올 수 없는 사단의 괴롭힘을 확인하고서

부르는 노래의 그림자가 됩니다.

그래서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새노래인 것이죠.(계15:3-4)

 

 

 

7. 언약식(출애굽기 16 - 24장)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 시킨 목적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출애굽기에서 출애굽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언약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모세가 가시떨기 나무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만났던 시내광야로 데려오십니다.

출애굽해서 3개월만이었습니다.(출19:1)

 

 

거기서 구약의 축이 되는 말씀을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출애굽기 19장 5-6절은 구약역사를 전개해감에 있어서 아주 중요합니다.

모든 세계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식을 맺는데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을 잘 듣고 지키라고 하십니다.

여기의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은 이후 2년동안 시내광야에서 주어집니다.

이 말씀과 언약을 가리켜 옛언약이라 하여 구약이라 하는데 바로 레위기를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후 1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에게 들려주실 언약의 말씀 레위기를 잘 듣고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둘째 이 언약의 말씀을 잘 듣고 지키는 조건 하에서 주실 첫번째 축복이 열국 중에서 하나님의 소유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소유란 말은 히브리어로 세킬라인데 이는 보배란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 귀한 존재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책임져주시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두번째 축복은 하나님께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제사장이란 라틴어로 폰 티펙스인데 뜻이 다리 놓는 자입니다.

제사장이란 하나님과 하나님을 만나려는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 나라는 다른 열방 국가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돕는 나라가 된다는 뜻입니다.

 

넷째 세번째 축복은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의 거룩한 이란 말은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민족과 달라야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성도라면 범사에 믿지 않는 자와 다른 것이 있어야 합니다.

건강관리나 마음씨, 하는 일 등 달라야 합니다.

이렇게 달아랴할 것을 하나님께서 이야기하시는데 도리어 거짓말을 하나님께서 사용하라고 하셨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말인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레위기를 잘 지키면 그 다음 세가지 축복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레위기를 잘 지키기만 해도 이렇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내게 복이 되는 말씀을 가리켜서 복음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레위기는 우리에게 복음인 것입니다.

특별히 레위기가 우리에게 얼마나 복된 말씀인지를 강조하는 것이 신명기이므로 신명기 설명 때에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모든 율례를 고하였고

이스라엘 백성은 모든 말씀을 준행하겠다고 언약합니다.(출24:3)

모세는 제물을 잡아 피를 준비하여 절반을 단에 뿌린 후에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해주고

이스라엘 백성은 모든 말씀을 준행하겠다고 다시한번 다짐합니다.

그러자 모세는 그 나머지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리면서

이는 여호와께서 모든 말씀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세우신 언약의 피라고 선포합니다.

즉 이 언약식은 피의 언약식인 것입니다.

지키지 않으면 피로서 갚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과연 이스라엘 백성이 이 언약의 말씀에 대하여 지켰는지 안지켰는지는

역사서가 증명합니다.

그러므로 역사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레위기 말씀을 잘지켰는가 안지켰는가 하는 기준으로 살피서

과연 출애굽기 19장 5-6절 사이 말씀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되었는가 평가하는 책인 것입니다.

 

 

 

8. 성막 준비와 성막 건축(출애굽기 25 - 40장)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식을 맺은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맺은 백성과 이제 함께 하십니다.

그 함께 하신다는 의미로 성막을 짓게 하시고 그 성막 가운데 그룹 사이에 거하십니다.

그룹 사이란 법궤 뚜껑인 시은소를 말합니다.

 

이 성막 준비와 건축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식양을 보여주시고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보여주신 대로 그대로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실 하나 나무 하나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순종합니다.

이 성막 건축부터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함을 훈련해 가는 것입니다.

다른 비유적 뜻이나 감추어진 진리가 있다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어진 식양대로 말씀 그대로 순종함이 요구된 것 뿐입니다.

 

 

물론 성막 건축이 순조롭게만 진행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금송아지 우상 사건이 이때 있었습니다.

금송아지는 애굽의 신 중 가장 위대한 신입니다.

나중에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왕도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릴 때에 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서 예루살렘에 못올라가도록 합니다.(왕상12:25-30)

아론은 백성들의 압박을 받고서 자기가 생각하기에 최고의 신의 모양을 만들어내었던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진노는 엄청났지만 모세가 간절히 중보함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은 멸망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나 금수나 버러지나 일월성신 등 그 어떤 것도 하나님 노릇하고자 한다면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불못에 가장 먼저 던져지는 자가 바로 짐승과 거짓선지자임이 바로 이 까닭입니다.(계19:20)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성막 준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비되기 시작하는데

이 일을 총감독한 이가 브살렐과 오홀리압입니다.

이들에게 부탁된 일은 오직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하라는 것입니다(출36:1)

출애굽기 39장부터는 한가지 일이 끝날 때마다 같은 말이 반복됩니다.

 

출 39:5 에봇 위에 에봇을 매는 띠를 에봇과 같은 모양으로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에봇에 붙여 짰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하였더라

출 39:7 에봇 견대에 달아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 보석을 삼았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하였더라

출 39:21 청색 끈으로 흉패 고리와 에봇 고리에 꿰어 흉패로 공교히 짠 에봇 띠 위에 붙여서 에봇을 떠나지 않게 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하였더라

출 39:26 방울과 석류를 서로 간격하여 공직하는 그 옷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달았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하였더라

출 39:29 가는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수 놓아 띠를 만들었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하였더라

출 39:31 그 패를 청색 끈으로 관 전면에 달았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하였더라

출 39:32 이스라엘 자손이 이와 같이 성막 곧 회막의 모든 역사를 준공하여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다 행하고

출 39:4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이스라엘 자손이 모든 역사를 필하매

출 39:43 모세가 그 필한 모든 것을 본즉 여호와께서 명하신대로 되었으므로 그들에게 축복하였더라

출 40:16 모세가 그같이 행하되 곧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행하였더라

출 40:19 또 성막 위에 막을 펴고 그 위에 덮개를 덮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되니라

출 40:21 또 그 궤를 성막에 들여 놓고 장을 드리워서 그 증거궤를 가리우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되니라

출 40:23 또 여호와 앞 그 상 위에 떡을 진설하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되니라

출 40:25 또 여호와 앞에 등잔에 불을 켜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되니라

출 40:27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되니라

출 40:29 또 회막의 성막 문 앞에 번제단을 두고 번제와 소제를 그 위에 드리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되니라

출 40:32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와 단에 가까이 갈 때에 씻었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되니라

'성경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경해석의 기본원칙  (0) 2019.07.14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0) 2019.07.14
성경을 배우는 목적  (0) 2015.06.03

성경을 배우는 목적

성경이야기 2015. 6. 3. 13:43
성경을 배우는 목적

◈성경을 읽는 목적은?

여호와 경외함을 배우는 것이다.



전도서12:13 사람의 본분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소원 자기 목적이 꽉 들어찬 사람들은 하나님 음성을 못 듣습니다.

자기 생각으로 자기 소원으로 똘똘뭉친 사람은 하나님 음성이 안 들려요.



그러니까 성경을 읽으려고 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할 때

자기의 소원을 내려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나 어떤 집회에 몸이 좀 안 좋은 사람이 왔다면

그 사람의 목적은 오직 자기 병 낫는 것이죠.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 음성이 잘 들리겠습니까?



성경은 창세기부터 하나님의 심정, 하나님 중심으로 이야기 하는데,

다른 소리 하지 말고, 내 병이나 고쳐” 

이렇게 자기 소원이 꽉 들어차면 하나님 음성이 안들리게 되죠.


이것은 누구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목회자라도 설교자라도 설교를 멋드러지게 해가지고

사람들을 우리 교회에 많이 모이게 해서 내가 목회 성공하겠다.

목적이 하나님 뜻이 전달되는게 아니고, 자기 목회 성공 이런 걸로 되어있으면

역시 하나님 음성이 잘 안 들립니다. 목회자라도..)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읽고 대하는 기본 자세가 자기 소원부터 내려놓으라는 겁니다.

거기에서 우리 소원이 먼저가 아니고.. 하나님 소원이 뭔가?

그것부터 좀 진지하게 알아보자는 겁니다.



하나님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우리 자신을 드려서 쓰임 받게 되면

하나님 소원이 이루어지는데.. 우리 소원을 하나님께서 외면하겠습니까?



그리고 종들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해야 하는데.. 줄로 알아야지.

뭐가 되겠다. 뭘 가지겠다. 뭘 하겠다. 해봤자  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최고의 가치는 하나님 아들됨이죠.’

이것이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게 된 것이  아닐까요?




'성경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경해석의 기본원칙  (0) 2019.07.14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0) 2019.07.14
출애굽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0) 2015.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