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경해석의 기본원칙

성경이야기 2019. 7. 14. 12:17

성경해석의 기본원칙 (김명도 교수)

참다운 성도라면 누구나 성경은 하나님의 정확 무오한 말씀으로 믿는다.
그런데 같은 성경을 놓고도 서로 해석하는 원칙이 다르기 때문에 혼란이 오고 논쟁이 악화되고 심한 경우는 성경해석의 차이에서 오는 다른 교리로 인하여 가정이 파괴되는 일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는 심각한 문제이다. 그래서 오늘은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가장 기초적인 상식을 말씀 드리고 저 한다. 

사람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사람의 머리로 판단해서 믿으려고 하지만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유는 유한한 인생이 무한한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지식과 지혜가 제한된 인간이 지식과 지혜가 무한하신 하나님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죄로 인하여 타락한 심성을 갖고 있는 인간이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을 판단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불완전하여 실수 할 수 있고, 하나님은 완전하여 실 수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인간이 제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도 인간의 머리로 인간의 지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판단할 수 없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누구도 이에 반박할 수 없다. 성경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 판단하는 사람의 지혜와 지식과 거룩함이 하나님보다 앞서야 하는데 그런 인간은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므로 실 수 할 수가 없고 피조물인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실수를 한다. 유한한 인간이 영원한 하나님의 일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이다. 

성경은 스스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 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딤후 3:16 말씀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강동으로 된 것으로” 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란 말은 원어인 헬라어 원문에서는 “theopneustos" 라는 한 단어로 되어 있는데 그 의미는 ”하나님이 입김을 불어 넣었다“ 라는 의미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입김을 불어 넣어서 기록했다는 말이다. 또한 베드로후서 1:21에 보면, “성경은 사사로이 기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받아서 기록했다“ 라고 말한다. 우리가 생각하기는 성경도 다른 수많은 종교의 경전과 같이 어떤 철학자가 도덕이나 윤리를 전할 목적으로 좋은 말씀을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성경은 결코 그런 철학자들이 인생의 도덕이나 윤리를 논하기 위해서 기록된 종교서적이 아니다. 성경은 그들 경전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성경기록자들은 자기의 말을 기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기록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성경 밖에서 입증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분명한 성경자체의 증거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불완전한 인간의 힘으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입증하고 싶어 한다. 이것을 16세기 종교개혁을 단행한 Martin Luther 는 “Theology of Glory” 라고 불렀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기 힘으로 무엇인가를 해내어 자기의 만족을 채우려는 인간의 노력을 말한다. Luther 가 신학자를 보는 관점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Theology of Cross” 이고 다른 하나는 “Theology of Glory” 이다. “Theology of Cross ” 는 십자가 앞에서 자기 자신이 죄인 됨을 깨닫고 주님에게 굴복하고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태도이고 “Theology of Glory” 는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기 힘으로 무엇을 해서 자기만족을 채우려는 노력이라고 했다. Luther 의 기준으로 보면 오늘 기독교계는 대부분 “Theology of Glory” 에 해당할 것이다.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를 내세우기를 좋아하는가?

그러면 성경이외에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입증할 수 있는가? 그것이 가능한가? 이들은 주로 고고학적 발굴 자료에 의존한다. 그중 유명한 것이 1930년대에 발견된 이른바 “나사렛포고령 Nazareth Decree" 라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지 얼마 안 되어 로마에 있는 교회에서 예수님의 육적부활을 믿는 유대인들과 예수님의 부활이 허구라고 믿으며 제자들이 주님의 시체를 훔쳤다고 믿는 유대인들 간에 충돌로 시끄러워지자 당시 로마의 Claudius 황제가 유대인들을 모두 로마에서 추방했다. 이때 고린도로 들어온 사람들이 아굴라와 부리스가 내외였다. 이것은 사도행전 18장에서 읽어 볼 수 있다.

그런데 “나사렛포고령” 이라는 것은 Claudius 황제가 명령한 칙령으로 “예수를 믿다가 죽은 사람의 무덤에는 손대지 말며 만일 이런 무덤을 훼손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라는 일종의 묘지법이다. 사방 1 foot 의 흰 대리석으로 된 이 원본은 지금 프랑스 파리의 Louvre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그 사본은 지금 이스라엘 북방 지중해 해변 가이사랴에 가면 바울이 벨릭스 각하에게 재판받던 원형극장이 있는데 그 원형극장 바로 앞에 갈색으로 된 모조품 (replica) 이 서 있다. 그러므로 이 문헌은 예수님의 부활을 입증하는 중요한 자료라고 고고학자들은 생각하고 있다. 

또 한 가지 고고학적 문헌은 1976년에 발견된 이른바 “에불라 문헌 Ebla Tablets" 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북방 지금의 수리아 Hammath 라는 곳에 있는 높은 언덕에서 발견된 이 문헌은 기원전 22세기에 한창 창성하던 당시의 Ebla 왕국의 왕립도서관에 소장되었던 17,000 장의 토판인데 이태리 로마대학의 Giovanni Pettinato 교수가 판독한 바에 따르면 이 문헌 중에는 에불라 왕국과 소돔과 고모라 성이 교역하던 내용의 문서들이 있는데 아브라함의 이름도 나오고 ”살렘“ 이라는 이름도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 성이 실제 존재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신학자들 중에는 소돔과 고모라는 실재하는 곳이 아니고 가상 도시였다고 믿고 있었는데 이 문헌의 발견으로 성경의 진리가 다시 한번 입증되어졌다. 한 가지만 더 말한다면 오랫동안 자유주의자들 중에는 헷 족속의 유적은 고고학적 발굴에서 찾을 수 없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헷 족속은 실제로 존재하던 부족이 아니고 가상적인 부족이 라고 믿고 있었고 독일의 신문기자로 있던 Werner Keller 라는 사람도 그렇게 믿고 있었으나 1940년대 고고학 발굴을 취재하기 위해 그가 발굴 팀을 따라가서 헷 족속의 근거지를 발견하게 되어 감탄한 나머지 책을 썼는데 그 책의 이름이 Die Bibel als History 역사로서의 성경이라는 책이며 미국 뉴욕의 William Morrow Co에서 1950년도 초반에 영문으로 번역하여 The Bible as History 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한 바 있다. 그 책 서문에서 저자 Keller 는 “누가 아무리 성경을 믿을 수 없다고 해도 성경은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임이 지금도 내 귀속에 방맹이질 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것은 모두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입증하려는 노력이지만 성경은 성경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분명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입증해 준다. 확실히 알 수 있는 정보를 놓아두고 다른 근거를 찾으려는 것은 죄악 된 인간의 심리이며 Martin Luther 가 말하는 “Theology of Glory” “vain glory 심리에 기인 한다

성경은 스스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증거 한다. 하나님에 관한 말씀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계시한 말씀인 것이다. 스위스의 신학자 Karl Barth 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증거가 아니다. 그는 말하기를 그 말씀은 내가 이성으로 받아 드릴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진실은 우리가 받아 드리건 말건 성경은 객관적으로 영원히 불변하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것이다. Barth 가 받아 드리건 말건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성경기록자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각자의 죄성은 없이하면서, 그리고 자기의 성격과, 학식과, 언어와, 문화적 배경, 취미 등을 그대로 살리면서, 하나님이 영감을 주시어 하나님의 뜻대로 성경을 기록하게 하였다 이것을 유기적 영감설이라고 하고 영어로는 organic inspiration 이라고 한다. 어떤 분은 “기계적인 영감설” 을 주장하면서 성경기록자들은 마치 로봇트 처럼 아무 생각도 없었고, 하나님이 불러 주는 대로 적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잘못인데 그 이유는 그렇다면 성경의 문체(Literary style) 가 왜 모두 서로 다른지 설명이 안 된다. 가령 요한복음은 문체가 간단하고 단문이나 중문이 많다. 복문은 적다. 반면 누가복음 은 복문이 많고 단어도 어려운 단어가 많다. 구약도 아사야서의 문체와 에스더서의 문체가 다르다. 기계적인 영감설로는 이런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유기적인 영감설로만 설명할 수 있다. 

성경은 보통 책과 다르다. 성경은 40명 이상의 서로 시대가 다르고 학식과 성격과 직업이 다른 사람들이 1500년에 걸쳐서 기록한 책인데 내용은 모두 한가지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을 가르쳐준다. 세상에 많은 종교 중에 인간이 어디서 왔는지 알려 주는 종교는 유대교와 기독교외에 없다, 기독교가 유대교에서 파생했지만 유대교는 기독교를 배척한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신약성경이 없다 그들의 성경은 TANAK 라고 해서 구약의 39권을 22권으로 나눈 구약만 있다. 성경은 죄로 인하여 죽게 된 인간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알려주는 하나님의 특별 계시의 말씀이다. 신구약 66권이 모두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을 분리할 수 없으며 하나의 일관성(cohesiveness)을 가지고 있다. Augutine 이 말한 것처럼 The New Testament is concealed in the Old and the Old in the New revealed 라는 말이 맞는다. 신약을 모르고 구약을 모른다. 흔히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이므로 신약이 완성된 다음부터 구약은 필요 없다고 가르치는 분들이 있지만 잘 못이다. 

가령 구약이 없다면 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하는지 모른다. 구약 신명기 21장23절에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 라고 했고 신약성경 갈라디아 3:13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려 돌아가셨다” 고 한다. 세례는 구약의 할례와 같은 것이며 성찬식은 구약의 유월절과 같다. 구약을 모르고 어찌 이해할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 얼마나 많은 구약성경 구절을 신약 특히 마태복음에 인용하고 있는가를 보라 그러면서 요 5:46에 “모세가 나를 증거하는 것” 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알려면 모세를 알아야 하고 모세를 안다는 말은 구약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악을 분리하거나 지금은 신약이 완성되었으니 구약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일등은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10장11절이나 로마인서 15장에 4절에 보면 “전에 가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라” 고 말하고 있다. 구약은 절대로 버릴 수 없고 신약과 구약은 똑같은 권위를 가진다. 구약은 “언약의 약속”이고 신약은 “언약의 성취” 이다. 기독교의 계시는 “점진적 계시(progressive revelation)" 이다. 마치 방안에 불이 켜질 때 점점 밝게 켜지도록 조종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시를 한꺼번에 모두 주신 것이 아니고 점진적으로 자기를 나타내 주셨다.

야곱이나 다윗에게는 부인이 많았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엡 5:22 절 이하에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말하고 있다. 이혼도 마찬가지이다 신명기 24장1절에는 이혼을 허락하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 마태복음 19장 7절 이하에서 "이전에는 백성들의 마음이 악하여 임시로 허락했던 것이고 본래는 그렇지 않다" 고 8절에 말한다. 먹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비늘이 없는 고기나 발굽이 갈라지지 않은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그런 제한이 없어졌다. 골로새 2:16-18에 보면 그리스도가 모두 십자가로 의식법을 철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우선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하나님이 바로 그 저자이시고 디모데후서 3:16절 말씀대로 하나님이 “입김을 불어넣어서” 기록했지만 그 기록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옛날 독일의 신학자였던 Richard Rothe 라는 사람은 성경의 언어는 이상하여 어느 헬라의 학자의 언어와도 다른 이상한 말이라고 해서 이 세상 어떤 사람도 알 수 없는 “하나님만 아는 말” 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는데 그런 것이 아니고 성경의 언어는 인간의 언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구약은 당시 히브리인들의 모국어인 히브리어로 대부분 기록되었고 극히 적은 부분이 아람어(Aramaic)로 기록되었고 신약의 경우는 모두 헬라어로 기록되었는데 헬라어는 크게 고전적 헬라어와 평민의 헬라어로 나누어진다. Classic Greek 이 있고 Hellenistic Greek 혹은 Koine Greek 이란 헬라어가 있다. 신약성경은 Socrates, Plato, Aristotle, Polybius, Xenophon, Sophocles 같은 인물이 즐겨 쓰던 고전적 헬라어가 아닌 시장에서 평민들이 사용하던 Koine Greek 혹은 Hellenistic Greek 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이 방면에 연구를 많이 한 사람은 Adolf Deissmann 이고 그 뒤를 이어 George Miligan, James Moulton, A.T.Robertson 같은 분이다. A.T. Robertson 은 미국 남 침례교 목사인데 20년간 연구하여 2,000 면에 달하는 큰 책 A Grammar of New Testament Greek in the Light of Historical Research 라는 대작을 1922년에 출판했다. James Moulton 도 4권짜리 Grammar of New Testament Greek 이라는 책을 영국 Scotland의 T.&T Clark 출판사에서 1940년경에 펴냈다. 

성경의 언어가 인간이 알아듣지 못하는 그런 언어가 아니고 기원 1세기 신약성경이 기록될 당시 일반이 가장 널리 사용하고 있던 평민의 헬라어라는 점을 말씀드렸지만 그렇다면 성경을 기록함에 있어서 기록방법은 어떠했을까? 성경기록자들은 누가를 제외하고는 무두 유대인들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언어습관, 언어 어법과 유대인들의 관습, 속담, 유대인들이 사고방식 등이 성경에 그대로 나타난다. 이것을 무시하면 성경해석상에 이상한 문제가 발생한다. 예를 들면 로마인서 12장20절에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게 하라 그리하므로 그의 머리에 산 숯불을 얹으리라” 라는 말이 있는데 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큰 일 날 것이다. 어떻게 산 사람의 머리 위에 산 숯불을 얹을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유대인의 관습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우리나라 속담에 “미운 놈 떡 한 개 더 주어라” 라는 말이 있듯, 유대나라에도 속담이 있다. “나를 괴롭히고 핍박하는 사람들을 후히 대하라” 라는 내용을 유대인들은 “저 사람 머리위에 산 숯불을 얹어 주어라” 라는 식으로 표현한다. 

또한 마태복음 24:28절에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 떼가 모일지니라” 란 말도 별 신학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말에 “바늘 가는 곳에 실 간다” 란 말이 있다. 같은 말이다. 언어에는 수사학이 있으며 영상법도 있고 상징적 표현도 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직유법과 은유법, 영상법을 보면 이런 것들이 있다. <불꽃 같은 눈동자로>, <병아리 나래 아래 품듯> , 이런 말들이 직유법이고 은유법은 누가복음 13:32에 나타난 ‘여우“ 처럼 또는 요한복음 1:29에 보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이라고 했는데 ”양“ 은 은유법으로 예수를 가리키는 말이다. 

또 성경에는 다른 문학서적 처럼 영상법을 통해서 말씀하기도 한다. 이것은 특히 묵시 문학(Apocalyptic Literature)에 많이 나온다. 가령 바다에서 올라오는 <머리가 일곱이요 뿌리가 열인 짐승> 같은 것은 사탄이 악함을 나타내 주는 영상표현법이다 (계 13:1). 144,000 같은 숫자는 문자 그대로의 수가 아니라 상징적인 숫자 로 <구원 얻은 자 전체>를 말함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할 때 이런 일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이상한 결론에 도달한다. <붉은말> 은 쏘련이고 <흰말> 은 미국이라고 해석 하는 따위는 성경해석을 그르치는 좋은 예이다. 성경에는 성경해석의 원칙이 있다. 성경해석의 원칙을 따르지 아니하면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결과가 된다. 

성경이 왜 헬라어로 기록되었을까? 헬라어로 신약성경이 기록된 이유는 모든 언어 중에서 헬라어는 가장 문법이 정확하고 바른 뜻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엡 2:8에 <우리가 믿음을 통해서 은혜로 구원을 얻었나니> 라는 대목에서 <구원을 얻었나니> 라는 말은 <완료형 남성 주격 북수 분사> 로 사용되었으니 한번 구원을 얻으면 구원을 잃지 않는다는 성경의 교리가 입증된다. 또한 요한일서 3:9에서 “하나님께로 난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 하나니” 란 대목에서 <죄를 짓지 아니 한다> 는 말은 <직설법 현재 삼인칭 단수 동사> 이므로 <하나님에게로 난자는 상습적으로 계속해서 고의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 는 문법적 설명을 통해서 거듭난 사람은 죄를 함부로 짓지 않는다는 교리가 입증된다. 

종교개혁 이후의 성경해석 방법은 즉 <역사적, 문법적 신학적 해석>이다. 성경구절을 해석할 때, 항상 이 세 가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옛날 Alexandria 에 Origen 이라는 헬라의 영지주의 철학에 물든 신학자가 있었다 그는 성경의 모든 구절은 4가지의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는데 그 네 가지란 <문자적 의미>, <도덕적 의미>. <풍자적 의미>, 그리고 <신학적 의미> 등이다 이것을 Origen 의 <사중해석법 (Origen's Quadruple Interpretation of the Scripture)> 라고 한다. 

예를 들면 그는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구절을 이렇게 해석했다. <거기에 나오는 예루살렘은 교회이고 여리고는 세상이고 강도만난 사람은 교회에서 타락하여 세상으로 나가니 강도를 만났다. 강도는 마귀이다. 레위사람이나 제사장이 지나갔다 구약을 말한다. 구약으로도 그를 돕지 못했다.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를 돌보아 준다. 사마리아 사람은 바로 예수이다. 사마리아 사람이 그 당시 가장 천대시 받듯 예수님은 당시 모든 사람에게서 천대를 받았던 인물이다. 기름을 발라주었다. 예수님이 은혜를 베풀었다. 주막으로 데리고 갔다 주막은 술집, 그 술은 포도주, 포도주를 파는 곳은 교회,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를 교회로 인도했다. 그리고 돈 두 입을 주면서 다시 올 때 까지 잘 보아 달라고 했다. 돈 두입은 구약과 신약이다. 주님이 재림할 때까지 교회가 잘 돌보아 줄 것을 당부했다> 라고 그럴듯하게 해석했다.

이렇게 해석하면서 Origen의 문자적 해석은 문자 그대로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는 것이고, 도덕적 해석은 불쌍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고 퐁자적 해석은 방금 위에서 말한 대로이고, 신학적 해석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 라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지금도 소위 영해 (靈解) 라는 것을 좋아 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성경의 구절은 한 가지 뜻 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자.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 가지 이상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하면 그것은 이미 성경해석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성경은 이 현령 비 현령(耳懸鈴 鼻懸鈴) 이 아니다. 

성경 해석시 문자적으로 해석할 것이 있고, 상징적으로 해석할 구절이 있다. 일률적으로 모든 성경구절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할 수 없다. 가령 요한복음 2:19-20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문자 그대로 46년간 걸려서 지은 성전을 사흘 만에 주님이 재건하신다는 말인가? 아니다. 그 뒤에 계속해서 읽어보면 주님은 그의 몸을 가르켜 하신 말씀임이 들어난다. 

몸이 죽어도 삼일 만에 부활한다는 뜻이다. 요한계시록 11장의 <1260일이니 42달이나 한때와 두 때 반> 이니 하는 말은 모두 상징적이며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요한계시록의 경우는 단 9:27절과 반드시 병행해서 해석해야 한다. 요한계시록 20장1-7절 사이에 6 번 나오는 <천년> 이라는 말은 문자적인가 아니면 상징적인가? 문자적이라면 성경이 기록된지 벌써 1,000년이 넘었으니 문자적이 아님을 금시 알 수 있다. 상징적이다. 우리는 이 숫자가 상징적인 것을 한다. <말세> 란 히브리 1:1이나 베드로전서 1:5이나 1:20등을 통해서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이 말세임을 안다. 그러므로 계시록 20장의 천년은 <문자적 천년>이 아니고<주님 재림 때까지 전 기간을 통한 기간>을 나타내는 상징적 숫자임을 알 수 있다. 

성경 해석 시에 가장 오류를 범하기 쉬운 것은 성경의 문맥을 무시하고 선입견을 가지고 혹은 임의로 해석하는 방법이다. 가령 마가복음 3:29에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금세와 내세에 영영 구원이 없다“ 는 말에서 ”성령을 훼방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목사들, 특히 부흥사들 중에서 이 구절을 오해하는 분들이 예상외로 많다. 심지어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방언 못하는 죄라고 가르치는 목사도 있다. 성경을 해석하는 기본 지식이 없는 사람이다. 문제의 성경구절에서 앞뒤의 문맥 (context)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신 일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본인이 하신 것이 아니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사탄의 이름중 하나) 의 힘을 빌려서 행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때 주님께서 29절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 해석을 믿기 어려우면 성경 마가복음 3장29절 그 다음절인 30절을 보면 의미가 의심의 여지없이 아주 분명해 진다. ”이는 저희가 말하기를 저가 더러운 귀신이 들였다 함이라“ 라고 스스로 설명해 주고 있지 않은가? 이와같이 문맥을 통해서 성경을 해석하라. 성경에 지금 내가 연구하는 구절이 왜 기록되었는지 앞뒤를 읽으면서 문맥을 잡아라.

이와 같이 성경은 항상 문맥을 통해서 해석해야 한다. 영어로는 “A text without a context is a pretext” 라고 한다. “문맥을 보지 않고 해석하면 궤변이 된다” 는 말이다. 얼마나 많은 설교자가 문맥을 무시하고 스스로 억지로 풀다가 이상한 교리를 만들어 내는가 우리들 주위에서 사이비 목사들을 보라, 주님은 우리에게 경고하신다. “너희중 지극히 적은 소자 하나 라도 실족케 하면 큰 연자 돌을 목에 달고 깊은 물에 빠져 죽은 편이 낫다” 고 마태복음 18장6절에 엄하게 경고하신다. 바른 성경해석으로 바른 복음을 전해야 한다.

앞서 성경해석 원칙은 <역사적 문법적, 신학적 방법>을 사용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종교개혁의 성경해석 방법이다. 어떤 성경구절을 해석할 때 우선 역사적인 배경을 공부해야 한다. 어떤 시대적, 정치적, 종교적 배경 속에서 이 성경구절이 기록되었는가를 본다. 이것을 알려면 Halley의 성경핸드북도 좋고 Hendrickson 이 쓴 성경 개관 Bible Survey 도 좋고 성경의 배경을 다룬 참고서들을 읽어보면 좋고 만일 그럴 재정적 여유가 없으면 그 성경구절이 들어 있는 성경 앞뒤를 계속해서 주의 깊게 읽어본다. 그래도 모르겠으면 그 책의 처음부터 읽는다. 

가령 마가복음은 어떤 문화적 정치적 환경 속에서 기록되었는가? 하박국은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기록되었는가? 학개서는? 등을 연구한다. 마가는 로마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기록되었는데 예수님의 섬기는 종 됨을 기록하면서 가장 간결하고 명료한 문체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안다. 학개서는 유대인들이 포로생활에서 돌아와서 성전 수축을 등한히 하고 개인의 가옥 수리만 열중인 유대백성에게 하나님은 학개 선지를 통해서 성전 수축을 명하는 배경이고 하박국은 하나님을 모르는 나라는 잘 되어 가는데 하나님의 백성은 왜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그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선지자 하박국이 <결국은 아무리 핍박을 받고 어려움을 당해도 의인은 믿음으로 살고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 한다> 는 내용을 알아 두어야 한다. 

역사적 배경을 알게 되면 다음은 골치 아픈(?) 문법적인 면을 해석해야 하는데 이것은 일반 평신도로서는 어렵다. 이유는 원어를 모르기 때문이다. 원어를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이다. 그래서 신학생들은 코피를 쏟아가며 매일 그 어려운 헬라어와 히브리어, 라틴어를 공부한다. 그러나 일반 성도도 열심만 있다면 집에서 능히 헬라어를 자습할 수 있다. Princeton 신학교 신약학 교수였던 J. Gresham Machen 박사가 쓴 신약헬라어 입문 같은 문법책을 사서 스스로 매일 아침 조금씩 헬라어를 터득해 갈 수 있다. 구약의 히브리어도 공부해야 하지만 히브리어는 그 언어의 체계가 헬라어와는 전혀 다른 어족(語族) 인 <셈어족, Semitic Language> 에 속하여 일반 평신도가 공부하기는 심히 어려울 것이고 헬라어만 공부해 두어도 구약은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해 둔 칠십인역(七十人譯)이라는 책이 있으니 그 LXX (칠십인 역 성경을 나타내는 기호) 를 헬라어로 읽으면 헬라어만 알아도 신학 공부를 엉터리로 마친 웬만한 목사 보다 더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다. 

문법적인 해석의 좋은 예는 요한복음 3:16이다. 많은 분들이 “그를 믿으면” 이라고 해석하지만 문법적으로 그것은 그릇된 해석이다. 원문은 <믿고 있는 모든 사람> 은 즉 의 의미이다. 요한일서 3:9에서도 "하나님께로서 난자는 죄를 짓지 아니 하나니" 에서 <죄를 도모지 짓지 않는다> 라는 말이 아니다. <죄를 상습적으로 짓지 아니한다> 는 의미이니 헬라어의 문법에서 <직설법 현재 형으로 부정문> 이니 <상습적으로 무엇을 계속 하지 않는다> 는 말이 된다. 엡 2:8에서도 “구원을 얻었나니” 에서도 <완료형 분사> 이므로 <한번 구원을 얻으면 영원토록 변치 않는다> 는 뜻이 헬라어의 완료형 의 성격에서 입증된다. 

신학적 해석은 그 성경구절의 앞뒤를 보아서 신학적으로 이 말이 무슨 교리를 가르치는가 를 연구한다. 가령 요 3:16을 보면 처음에 “사랑하사” 라는 말이 먼저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속에서 <사랑>의 개념이 앞선다는 것을 안다. 그 다음 부분은 <주사 ,아들을> 이렇게 시작된다. 그러므로 <그 구속은 아들 예수에 의해서 이루어짐>을 안다. 성경의 다른 곳을 통해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믿음이란 우리가 스스로 믿게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안다( 엡 2:8) 고로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누린다> 는 내용이니 <그리스도의 구속의 가장 기본 교리> 를 터득할 수 있다. 

이제 중요한 부분을 말하고 저 한다. 성경을 해석할때 주의할 것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특별은사 혹은 임시 은사> 이다. 이런 은사는 성경기록이 완성 될 때까지 하나님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역사하셨다. 히브리 1;1 이나 WCF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에 보면 이런 방법이 성경완성과 함께 지금은 끝났다고 가르쳐 준다. 이것을 <계시의 종결> 이라고 한다. 개혁주의는 계시의 종결을 믿는다. 지금은 하나님이 옛날 성경기록 당시처럼 그렇게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역사하지 않으시고 기록된 말씀만 가지고 역사하신다는 것이 개혁주의 신앙의 골자 이다. 종교개혁가들은 이라고 외쳤다. “오직 성령” 이 아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중거 한다 (요15:26). “오직 성경“이란 말 가운데는 ”성경의 충족성, Sufficiency of the Bible" 이 들어 있으을 알자.

둘째로, 성경에 나오는 <이적> <기사> 를 모방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성경기록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초자연적 이적이나 기사를 모방하려한다. 가령 죽은 사람을 장사하지 않고 3개월 동안 놓아두고 살아나기를 기다리면서 계속 기도한다든지 병든 자를 고치기위해서 약을 쓰거나 병원에 가지 않고 기도만 한다든지 하는 일은 성경해석의 원칙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예수님이 하셨으니 나도 할 수 있고 내가 해야 한다“라는 말은 위험한 발상이다. 가령 예수를 모방한다면서 채찍에 노끈을 매어 잘 못 하는 교회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마구 내 보내고 강대상을 뒤집어 엎을 수 없다. 주님이 그렇게 했다고 해서 우리가 그렇게 할 수는 없다. 흔히 이런 말을 한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라고 하지만 그것은 잘못 된 질문이다. 예수는 조물주인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다. 그가 하는 일을 우리가 모두 할 수는 없다. 예수님의 기적과 이적은 항상 구원과 관계가 있다. 구원의 성질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려는 목적이 있다. 오히려 이렇게 묻는 것이 당연하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기를 원하실까? ” 라고. 

셋째로, 성경해석은 어디까지나 <성경을 성경으로 푸는 것 Scripture is interpreted by Scripture> 이며 <환상>이나 <계시> 이나 <경험>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늘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런 오류에 빠지고 있다. 성경구절의 의미는 처음에서 끝까지 성경자체에서 그 바른 의미를 찾아야 한다. 모든 성경이 모두 일률적으로 뜻이 명확하지 않다
잘 이해하기 어려운 어두운 부분은 밝은 구절 즉 확실히 알 수 있는 구절에 비추어서 해석한다. 이것이 성경해석의 방법이다.

성경해석이나 신앙생활에서 인간의 경험은 가장 위험하다. 경험은 사람마다 각자 다르다. 누구의 경험이 옳은가? 성경해석은 경험이나 계시에 의존해서는 절대 안 되며 성경에서 답을 찾고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종교개혁가들은 이 점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부디 우리 모두 바른 성경해석으로 바른 말씀을 전하여 이 다음 그리스도 앞에 설때에 다른 복음을 전했다고 책망을 받지 않도록 주의 하자. 오늘 <성경해석의 기본 원칙> 이라는 주제의 강의를 마치고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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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섭 목수

세상 이야기 2019. 7. 14. 08:31

조선시대 가구를 세계인의 가구로 만든 목수

단아한 아름다움이 마음을 끌어당긴다. 장식적인 요소라고는 거의 보이지 않는, 기능에 맞춰 자르고 짜 맞춘 나무 가구. 참나무ㆍ단풍나무ㆍ호두나무ㆍ벚나무ㆍ물푸레나무 본연의 색깔이, 나뭇결이, 군데군데 파인 옹이가 그대로 드러난다. 문화지킴이 재단법인 아름지기가 안국동 한옥에서 연 <생활 속의 아름다움-한옥 공간의 새로운 이야기>전에서 선보인 이정섭 씨의 가구다. 

한옥 생활에 어울리는 가구를 제시하는 이 전시를 위해 이정섭 씨는 3인용 소파와 낮은 테이블, 조명 콘솔, 식탁과 의자, 책장 혹은 장식장으로 쓸 수 있는 5단 장, 6단 장 등을 제작했다. 입식생활을 하는 현대인의 필요를 충족시키면서도 한옥이 갖고 있는 공간감, 정갈하고 단아한 맛과 잘 조화되는 가구다. 색을 입히거나 래커칠도 하지 않고 식물성 기름만 발라 마무리해 나무 그대로의 물성(物性)이 드러나도록 했다. 조각가 김창세 씨(목포대 교수)는 “미인의 화장하지 않은 생얼을 보는 것 같다”고 표현한다.

 

스스로를 ‘목수’라고 하는 이정섭 씨는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도관리 산골에 살면서 작업한다. 그렇다고 그를 은둔형의 폐쇄적인 인간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내촌을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찾아오는 문화마을로 만들겠다는 게 그의 포부다. 4960㎡(약 1500평) 땅에 살림집과 작업장, 전시장 등 건물 다섯 채를 지어 놓은 데 더해 1910년대 지어진 가게, 1955년에 시작한 이발소, 수십 년 된 창고 등 마을의 역사가 묻어나는 공간들까지 확보해 놓았다.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마을 전체를 문화공간으로 만들고 싶은 꿈 때문이다. 이미 4개 전시장 중 두 군데에서는 자신이 만든 가구를 전시하고, 두 군데는 독특한 기획의 전시를 열어 외지인의 발길이 잦다. 이번에도 마음 맞는 사람들과 일을 벌였다. 서울대 은사였던 화가 서용선 씨의 기획 아래 폐광지역인 태백과 홍천의 내촌 창고(전시 공간), 서울의 상명대학교에서 동시에 전시하는 ‘트라이앵글 프로젝트’를 벌인 것. 내촌 창고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작가들이 10월 31일까지 나무를 재료로 한 입체나 설치작품을 전시한다.

“전시 준비를 위해 일본에서 온 작가들을 먹이고 재우느라 그동안 정신이 없었다”는 이정섭 씨를 안국동 한옥에서 만났다. 그는 서울대 미대 서양화과 91학번이다. 그런데 화가가 아니라 왜 목수가 되었을까? 

“남이 쓴 책을 가지고 공부하는 게 아닌, 뭔가 창조적인 행위를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고민했습니다. 국문과나 미대, 음대를 가야 할 것 같았는데, 글 쓰는 재능은 없고 어렸을 때 반공 포스터를 잘 그려 칭찬받았던 게 생각나 미대에 지원했지요.”

그런데 ‘내가 하는 작업이 사회나 보통사람들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하는 의문이 맴돌았다. 동네 간판이나 광고 전단지 등 뭐든 만들어 준다는 의미로 ‘다해종합미술기획’도 시도하고, 서울시 공무원을 1년 동안 설득해 을지로 지하보도에서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기도 했다. 30m 길이의 통로 벽을 광고판만 한 캔버스에 아크릴로 그린 작품들로 채우느라 재료비 마련을 위해 어렵게 장만했던 카메라도 팔았다. 우리나라에 ‘공공미술’이란 개념이 제대로 자리 잡기도 전인 1999년의 일이다. 그러다 모든 것을 접고 시골로 가기로 결심했다. 

“서울생활을 이어 가려면 내가 누울 집 한 칸 마련하기 위해 아등바등해야 하는데, 그럴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이 들더군요.”

 

강원도 산골인 내촌을 세계인이 찾는 문화마을로 만들 것

무조건 농촌으로 내려간 그는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한옥 짓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곳이 있다는 것을 보고 태백으로 갔다. 기초적인 공부를 한 후 현장에 투입됐는데, 남들보다 쉽게 배워 재능 있다는 소리도 들었다. 대목이 되어 남의 집을 지어 주던 그는 3년 전부터 가구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현대인의 생활이 달라진 만큼 한옥도 시대에 맞춰 변화, 발전해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보통 ‘한옥’이라면 조선시대에 멈춰 있어서 정형화된 틀만을 요구하더라고요. 동어반복적인 일을 하는 데 회의가 일었죠. 그래서 가구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사방탁자 등 조선시대 가구를 보고 “흠 잡을 데가 없다”고 감탄했던 그는 그 정신을 오롯이 받아들이면서도 우리 시대 세계인이 함께 쓸 수 있는 가구를 만들겠다고 목표를 정했다. “저는 옛 형태를 재현한 한옥마을에서 한국성을 찾지 않아요. 산골마을의 야트막한 함석집이나 섬진강가에서, 박경리의 소설이나 김용택의 시에서 그걸 느끼지요. 그런 혼, 정신을 제 가구에 담아내려 했고요.” 

조선시대 가구를 바탕으로 했으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절제미가 서구의 모더니즘을 연상시키는 그의 가구는 얼마 안돼 눈부신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2005년 첫 개인전을 연 이래, 2006년 서울리빙디자인페어에서 ‘Editors awards’를 받았고, 2007년에는 세계도자비엔날레 초대작가로 선정된 데 이어 스위스에서 전시회를 하고, AHEC(American Hardwood Export Council)에서 ‘세계의 가구 디자이너’로도 선정됐다.

 

“너무 빠른 성공이 아니냐?”고 했더니 “나보다 감각이 뛰어난 사람도 많지만, 그들이 이 판에 뛰어들지 않는 바람에 가능했다”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미대에서 시각훈련을 받아온 데다 한옥을 지으면서 계속 나무를 만져 ‘나무의 성질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가구를 만들 줄 알았기 때문’이라며. 나무의 아이덴티티와 역사인 옹이와 나뭇결을 가장 자연스럽게,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그의 가구를 보고 “나무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고 했더니 그는 “특별한 애정은 없어요”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김형경 소설에 ‘자연을 좋아하는 것은 인간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는 그 무엇 때문’이라는 구절이 있어요. 누구든 자연을 좋아하게 되어 있는 거니까, 나도 보통사람 정도로 좋아하는 거지요”라면서. 그의 가구가 소박하면서도 빛나 보이는 것은 시각적 비례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황금비례라는 비너스의 몸매가 아름답게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 부분이 1mm만 두껍거나 얇아도 비례가 깨집니다. 그런 것은 불 때 버리지요. 아깝다는 생각에 다른 사람에게 주거나 싼 가격에 팔면 스스로의 가치를 지킬 수 없으니까요.” 

최근에는 수입 가구점들이 즐비한 청담동 명품거리에 ‘내촌목공소 서울’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그의 가구를 파는 곳이 생겼다. 한 점당 수백 만 원. 그의 가구에 열광하는 마니아도 높은 가격 때문에 선뜻 구입하기는 어렵다. 이제까지는 주로 대기업 집무실이나 회의실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는 “돈 버는 것도 제 작업의 중요한 일부분”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제가 목수하면서 세속적, 사회적으로도 성공해야 ‘저렇게 전망이 있으니 내 자식도 목수를 시켜야겠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겠습니까?”라고.

그는 이제 다시 집을 짓겠다고 한다. 옛집 형태 그대로를 이어받은 한옥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 맞는 한옥을 제시해 보겠다고. 그러면서 “집과 그 안의 가구까지 한꺼번에 만들어서 팔 생각”이라고 한다. 비합리적으로 짜 놓은 틀을 강요하는 학교 생활을 견딜 수 없어 고등학교를 자퇴했다는 그. 어린 나이에 이리저리 부딪히며 사회를 경험하다 대학에 진학했다는 그는 사회적 통념을 뒤집는 시도를 끊임없이 할 것 같다.

사진 : 문지민

Meas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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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성경이야기 2019. 7. 14. 08:22

예수를 믿는다는 것 (김성수 목사)

신명기 28장 15절
1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16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사도바울이 이 신명기 28장 16절의 이 단어를 끌어다가 자기의 삶을 설명해요
예수님이 저주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이사야서 53장의 그 내용이 그거잖아요.

채찍에 맞고,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아났다~에서 그 저주의 삶,
이게 신명기 28장의 그 저주의 삶이었는데

그런데 그 삶이 그대로 내 삶에 나타나더라를 설명하는 거예요.

내가 진짜 하나님의 사도 맞어~ 내가 성도 맞어~ 라고 이력서를 쓰는데
이게 성도의 증거라는 뜻이에요.

성도의 증거가 뭐냐면
하나님의 저주 아래에 있는 자,
그래서 결국에는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는 그 삶을 증거로 내놓더라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내가 그 삶을 살았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럼 보세요.
신명기 28장의 그 내용들이 니네 율법 잘 지켜~ 그럼 복 주게~ 이 내용이에요?
아니 니들은 이 세상에서 율법의 저주, 그 저주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삶을 살게 될 거야~
그거 이야기해 주는 거예요.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고
한 길로 들어왔다 일곱 길로 도망가고 머리가 될 지언정 꼬리가 될~
이게 다 신명기 28장에 나오는 그 목록이거든요.

그거 여러분 냉장고에 적어 놓는다는 건 나 예수 안 믿고 이 땅에서 복 받고 지옥 갈 테니까. 하나님 나 지옥 보내세요.
이 말과 똑같은 거예요. 무서운 거예요. 그거 지우세요. 가서. 떼어 버리세요.

여러분은 이 땅에서 복을 받고 이 땅에 육을 살찌우는 삶을 살게 되면 절대 하나님 나라 못 들어가요.
저주 받아, 죽어야 들어간다니까요.

여러분 안에서도 율법이 완전케 이루어진다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구약의 율법은
지키라고 준 게 아니라 지킬 수 없음을 깨닫고
그것을 지키지 못했을 때에 저주를 몸으로 받아 내면서
육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라는 목적으로 주신 게 맞는 거예요.

은혜 붙들어라~ 예수 믿어라~
간단하게 말해서 예수 믿어라~ 다른 거 없다. 예수 믿어라~

말씀 전체가 ...율법과 선지자 말씀 전체가 다 그 의미로 주어진 거예요.

예수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시기 위해
육을 부정당하고 십자가에 그 육을 매다신 것처럼

우리에게 그 말씀이 완료로 침노해 들어오게 되면...
우리도 역시 십자가에 매달리는 삶으로 끌려가게 되는 거예요.
그게 말씀대로 사는 거예요.

말씀에 의해, 법에 의해 끌려가는 삶. 이게 말씀대로 사는 거예요.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열심히 죽으시고 열심히 부정당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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